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네빌 체임벌린 (문단 편집) ==== 옹호론 ==== 대체로는 부정적으로 평가되는 체임벌린이지만, 1970년대부터 영국을 중심으로 체임벌린에 대한 재평가 내지 옹호론도 하나 둘 일어난 바 있다. 일례로 체임벌린은 집권 후 기존 내각이 추진하던 재군비 정책을 보다 가속화했다. 이는 독일의 팽창에 대한 대응책으로 '군사적 옵션'이 필요함을 분명히 하는 것이었다. 다만 재군비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보니 시간을 벌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를 팔아먹는 데 동의한 것이고 이것이 그의 평가에 늘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것이다. 체임벌린의 재군비 강화 방침이 아니었다면, 영국은 보다 더 암울한 상태로 세계대전을 맞이하거나, 아예 군사력 부족을 이유로 폴란드 침공을 묵인했을 수도 있었다. 물론 독일 또한 군비를 키웠지만, 영국 공군은 여기서 확실히 이득을 봤다. 1937, 38년에 영국의 군용기 생산량은 연간 5천 대 이상 생산하는 독일의 절반 수준에 불과하였으나 그 다음 해인 1939년에는 8천 대가 조금 안되는 수준으로 끌어올려 8천 대를 조금 넘게 생산하는 독일을 거의 따라 잡았다. 단순히 수량만 늘린 것이 아니라 항공기 생산에 필요한 경금속 생산량을 늘리는 계획도 수립하였다. 체임벌린이 단순히 대독 유화론자였다면 1939년 3월 체코 병합 이후 대독정책의 기조를 변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일방적 협정 파기와 체코 병합에 격분하여 아직 재군비가 충분히 되지 않았다는 보고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와 함께 대독 강경노선 및 폴란드에 대한 안전 보장을 천명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체임벌린은 1939년 9월의 폴란드 침공과 함께 실각했어야 했으나 실제로는 1940년 4월까지 정상적으로 총리직을 수행하며 전쟁을 지도했다. 노동당이 그의 전시내각에 불참한 건 어디까지나 체임벌린 개인에 대한 사적 불만이었지 그의 대독정책과는 무관했다. 그리고 체임벌린이 실각한 이유는 노르웨이 전역의 패전 때문이었는데, 노르웨이 전역은 처칠이 주도하였고, 그 패배 책임을 모두 체임벌린 탓으로 돌린 것이다.[* 사실 처칠이 이런 게 처음이 아니어서 1차 대전 당시 [[다르다넬스 해전]]과 [[갈리폴리 상륙작전]]의 패배를 해군참모총장이었던 존 피셔 제독에게 떠넘기고 해임시킨 전적이 있다. 정작 피셔는 여기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고 이런 책임 떠넘기기로도 책임 회피에 실패해서 해군장관에서 물러나야 했다. 2차 대전 시점에서도 이 버릇을 못 버린 것. 그리고 독일이 노르웨이를 점령하기는 했지만 독일 해군은 이 때 큰 타격을 받아 이후 대전 내내 소극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 해군의 재군비 계획을 몇 년 앞서 히틀러가 개전하는 바람에, 레더 제독이 "우린 이제 명예롭게 죽는 길만 남았다." 했다는데 그 얼마 안 되는 전력을 여기서 많이 손실했다.] 그리고 처절했던 1차대전이 끝난지 얼마 안되었고 작위를 이을 사람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많은 희생을 했는데 그런 상황에서 또 전쟁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기성세대는 적지 않은 이들이 지옥같은 전쟁터에서 살아돌아온 사람들이었는데 자신의 아들들을 다시 전쟁터로 밀어넣는 결정은 더욱 지지를 받기 힘든 상황이었다.[* 연합국과 추축국을 막론하고 2차 대전기의 정치인/관료/장군들은 1차 대전에서 병사나 초급 장교로 참전한 이들이 많았고 아들이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사례도 제법 있다. 그리고 일반 가정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국내 여론 뿐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공격에 소극적이었던 프랑스를 어떻게 설득하느냐는 문제도 남아있었다. 체임벌린에 대한 부정적 평가에 쐐기를 박은 것은 체임벌린의 대독 유화론을 비판하고 강경론을 주장했던 [[윈스턴 처칠]]이다. 그러나 그는 체코슬로바키아 당국에는 '사실 자신이 영국 수상이었더라도 같은 정책을 펼쳤을 것'이라고 은밀하게 말했다. 체임벌린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동의를 받아, [[아돌프 히틀러|히틀러]]와 한 두 번째 만남에서 히틀러의 요구를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때 히틀러가 평화적인 사태 해결을 피하기 위해 추가 요구를 하자,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독일이 전쟁의 구실을 찾는다는 사실을 인식하여 뮌헨 협정을 체결했다. 협상을 통해 전면전을 피했다는 점에서 전세계가 안도했지만, 이를 자기 경력 최대의 실수라고 본 히틀러는 아주 불쾌하게 여겼다. 옳든 그르든 히틀러는 독일이 이때 전쟁을 하는 편이 나았다고 생각했다. 결국 히틀러는 1939년에 전쟁을 벌이기로 했다. 1938년 체임벌린에게 속아넘어갔다고 생각한 그는 이번에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할 심산이었다. 이렇듯 히틀러가 뮌헨 협정을 체결하고도, 침략전쟁을 벌여 협정을 어김으로써 '히틀러는 못 믿을 인간'이라는 것이 영국 국민을 포함한 전세계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각인되었다. 그 결과 히틀러는 다시는 협상에서 이득을 얻을 수가 없었고 분열되었던 영국 국민의 국론을 통일시켰다. 영국 국민들은 한 목소리로 이제는 독일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히틀러와 협상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완전히 드러났기 때문에 영국은 끝까지 내몰리는 순간까지도 협상에 응하지 않았다. [[폴란드]]가 무너지고 [[프랑스]]가 넘어가고 [[런던]]이 폭격받는 상황에서도 처칠이 독일과 협상에 응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독일과 협상을 해봤자 체임벌린처럼 당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퍼졌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렇게 당하고도 여전히 독일과 협상을 해야 한다는 [[에드워드 8세]] 같은 사람이 있었음을 보아, 만약 체임벌린이 앞서 협상 단계에서 결렬되고 회담이 실패했다면 독일과의 전쟁 도중 독일과 협상한다는 선택지는 여전히 영국 국민들의 마음 속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국이 몰리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그 선택지를 고려해보라는 압박이 나왔을 것이다. 1938년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독일의 군대가 정말 강력한지 아닌지, 체임벌린이 무슨 수를 써도 알 방법이 없었다. 그러니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의 기만작전에 속아넘어갔고 그렇기 때문에 실패했다는 말은 의미 없는 주장일 뿐이다. [[영국]]과 [[프랑스]]는 당시에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를 골랐다. 시간을 벌고 전쟁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에게 안타까운 것은 단지 준비할 시간이 1년밖에 되지 않았단 점이지만, 독일도 1년밖에 전쟁 준비를 하지 못했기는 마찬가지였다. 독일이 전쟁 준비가 완벽하게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에 패배했음도 사실이다. 히틀러는 패전을 앞두고 만약 1938년에 체코슬로바키아를 공격했다면 전쟁을 국지화할 수 있었을 테고, 영국과 프랑스는 정치적 자산이 무너진 채 소극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즉,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고, 몇 년 동안 세계 대전을 연기하면서 군사력을 강화시켰다면 독일은 전쟁에서 승리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